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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기자, 여행감독 1호, 재미로재미연구소 소장. 이메일 gosisain@gmail.com 트위터 twitter.com/dogsul 페이스북(페이지) facebook.com/kojaeyoul 독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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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의 추억을 담은 다섯 통의 편지

298세대 아이콘 100 | 2008. 12. 9. 08:04 | Posted by 소셜미디어의 촌철살인마 독설닷컴


<독설닷컴>이 동을 뜬 ‘298세대론’과 관련
96학번 건축학부님이 쓰신 
‘1996년 8월,
내 인생의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
을 읽고 루마니아 영국 미국 등
세계 곳곳에서 감상문이 왔습니다.



2백 개가 넘는 공감 댓글이 달렸는데,
특히 해외에 계신 분들이
더 감상에 젖으신 것 같았습니다. 
다섯 통의 편지를 공개합니다.

 

다섯 통의 편지의 모티브가 되었던 아래 글들을 읽고 편지를 읽으시면 더욱 감동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2008/12/03 - [298세대 아이콘 100] - 386세대와 88만원 세대 중간의, 298세대를 아시나요?

2008/12/06 - [298세대 아이콘 100] - 어느 90학번의 기억 속에 남은 1980년대의 잔상

2008/12/07 - [298세대 아이콘 100] - 1996년 8월, 내 인생의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 (298세대론)




하나, 루마니아에서 온 편지

제가 알고 있는 대한민국은 참 늘 변화가 심하고
너무 다양한 일이 생기고
때론 헛웃음을 짓게 만들 정도로 어이없는 일이 많아서
그 시대마다 추억 거리는 많다고 봅니다.


저두 96학번 분의 글을 읽다가 추억에 잠기면서 저의 애기도 한 번 써봅니다.


1999년 이메일을 알게 되었죠.
"오빠, 이메일 주소 좀 가르쳐 주세요. "
대학교 후배가 병장 휴가를 마치고 들어갈 때 저에게 물어본 질문이었는데, ‘조금 있으면 제대할텐데 뭐, 그래도 물어봤는데 써줘야지’ 하면서  "강원도…어쩌구 저쩌구..."
주소를 써내려 갈 때 울 후배,
"부대 주소 말고 이메일 주소요"라고 했을 때, 잠깐 스치는 생각이 있었죠.
‘아 …이메일 그래 요즘 많이 쓴다는 그 전자주소인가 하는...’
내가 잘 몰라 멋쩍어 하니
친절한 후배가 내 계정을 하나 만들어 주었었죠.


95학번,
윈도우 95가 있지만
제가 대학 들어갔을 때는 아직까지 인터넷보다는 주로 녹색 화면에 하는 통신이 유행했었죠.
전 그거 한 번도 안 써보고 바로 인터넷으로 가긴 했지만…


어릴 적 컴퓨터를 첨 접한 게
초등학교 4학년 때 동내 컴퓨터 학원이었습니다.
도스 배우고 플로피 디스크에 간단한 게임 넣어서 했던 기억이 나네요.
"빠바바밤 빰빠 " 방귀차


그리고 제가 중학교하고 고등학교 때 쯤인가는 스트리트 파이터가 한참 유행했었죠,
동네 오락식에 동전 올려놓고 상대방과 서로 반대편에서 게임을 하는 건 그게 시초가 아니었나 싶네요. 
저는 열정적이진 않았는데 구경하는 재미는 솔솔했던 거 같네요.
특히 자기보다 어린 아이에게 지던 사람들의 엄청난 살기^^는...


그리고 낚시줄하고 전기라이터가지고 오락실에게 튀기기 하다가 주인한테 걸려서 혼나고 쫓겨나는 것도 가끔 보구…전 지켜보는 경우였죠.


그리고 고등학교 때하고 대학교 초창기는 컴퓨터 워드 타자 연습으로 단문/장문 타자 연습을 하곤 했죠.,
이거 좋아하는 얘들끼리는 단순 500타 깨기도 하고, 가끔 내기도 하곤 했는데.


초등학교하고 중학교를 생각해 보면, 참 일본 해적판 만화를 많이 봤던 것 같네요.
책상 서랍에 슬럼 덩크하고 드래곤볼 북두신권 넣고 보고,
그러다 걸리면 열라게 맞거나 손들고 서 있고
물론 거의 만화책은 압수였죠.


고교 평준화로 고등학교 떨어질 일은 없었지만, 기계공고를 갈까 고민을 많이 했죠.
당시 해운대에 있는 기계공고에 가면 알 길 보장 된다는 얘기가 있었거든요.


(사족이지만 이 기획도 아마도 대학을 나온 사람들 위주로 진행되겠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사회를 나간 분들의 글들도 좀 많았으면 합니다. )


성적은 기억이 안 나지만
고등학교에 들어가 오성식의 팝스 잉글리쉬하면 영어에 도움이 될까 하고 새벽에 가끔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아마 90년대 새대가 영어시험에 듣기라는 것이 강조되고 성적에도 들어가기 시작한 시대가 아닐까요?


1993년도 고2 때 학력고사
1994년도 고3 때 수능 1,2차
1995년도 저때 수능 한번


우리나라 고3이 교육시스템 변화의 피해자라고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
저희 학번들도 늘 그 생각을 하고 살고 있죠.
매년 바뀌던 대입방법,
물론 수능을 친다는 건 알았는데
한번인지 두번인지가 1994년 초엔가 결정 났던 거 같네요.
거기에 참 뭐 같았던 본고사.


전 개인적으로 본고사를 세 군데를 봤는데
없는 살림에 지방에서 올라와서 보느라고
여관에서도 못 자고 목욕탕에서 자고 시험보러 갔던 기억이 나네요.


그렇게 해 대학에 입학해서리
전두환 노태우 비리 대통령 관련해서 시위했던 기억이 나네요.
외대 정문에서.


월드컵 자봉단
배낭여행
세계화
국제결혼
해외체류
할 말이 더 많은데...


고 기자님.
참 오랜만에,,, 거의 처음으로 장문으로 쓰는 거라 힘드네요.
그리고 여긴 루마니아라 새벽 4시네요.
낼 출근해야 되서리 이만...


이번 기획 참 좋아보이네요.
오랜만에 옛날 생각나서 저두 몇 가지 써 봤습니다.
기회가 되면 더 썼으면 합니다만, 자신이 없네요.
이번 주는 일도 많은데.







둘, 영국에서 온 편지



안녕하세요.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같은 96학번의 한 사람으로.. 정말 그때의 일들이 머리에 스치면서 잔잔하게 웃었습니다.


저 역시 96-97년도의 연대사태를 온 몸으로 느낀 한 사람으로
최루탄에 눈물 흘리고 선배들에게 이끌려 몽둥이를 피해다니며 이를 박박 갈던 때가 있었는데..
그것도 잠시.. 98년에는 군대에 가야했고
제대후에는 바보가 되어버린 머리와, 미쳐버린 등록금고지서 덕분에
학교보다는 휴학계를 던지고 일을 해야했고..
잠시 학교를 다니다가, 이대로는 이 나라에서 살 수가 없을 것 같아서
모든것을 버리고 배낭 두개로 혼자 영국으로 건너와,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그때는 이렇게 하는 것이 과연 잘하는 것인가.. 생각했었지만..
저주받은 96학번으로 대한민국에서 지금까지 살고 있었다면
아마도 혀깨물고 이미 세상과 하직했을듯 합니다.


여기도 사람사는 곳이라 그렇게 다르지는 않지만, 곰팡이핀 빵을 먹어가며 공부를 마치고
지금은 어느정도 자리잡고 살고 있습니다.
7년동안의 영국생활을 뒤 돌아보면..
눈물보다는 흐뭇한 웃음이 나지만, 그 7년을 한국에서 보냈더라면..
과연 뒤를 돌아볼 여유조차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흔히든 저주받은 93학번이라고 했지만.. 지금은 저주받은 96학번이 맞네요..
불행히도 저희 집은 그 저주받은 학번이 둘이나 된다는... ㅜㅜ 하나도 벅찬데 말이죠.


다시한번.. 가슴에 와 닿는 글 감사합니다. 자주 들르겠습니다.


영국에서.





셋, 미국에서 90년대를 보낸 누리꾼이 보내온 글



뭐...
96학번에 77년생이지만...
별로 같은 시대를 공요한것 같진 않군요..
뭐... 그때 조기유학...(거의 1세대라고 봐야겠죠)으로 미국에서 막 대학교 들어 갈 때였으니깐...
뭐... 그래도 94년까진 한국에 있어서리...

90년대 중반까지 서태지와 더불어 최고의 인기를 누르던 공일오비.
인터넷전에 유행했던 천리안.
92년인가 93년의 베버리힐스의 아이들과 베이왓치라는 미국드라마가 우리세대의 이상이였던 웃긴 시대...
아... 물론 슬램덩크로 시작된 NBA열풍과...
94년의 마로니에의 칵테일사랑과 그에 대면되는 순정만화가 최소 여학생들에 한해서 문화코드였던 시기...


아... 그리고 나중에 90년대 말인가... 판타지소설이 뜨고, 퇴마록같은...


지금 생각해보면.
이 글처럼...
어느 정도 풍요기의 막차를 탄 세대라서 그런진 몰라도...
아님 저런 96 연대사태를 거치며 사회에서의 패배를 공유해서 그런진 몰라도...
확실히 꽨 낭만주의가 판을 치는 세대라고 봐야겠죠...
낭만주의라는게 결국은 현실주의의 반대라고 보면 이해가 싶겠죠.


이상론적 좌익의 298세대던...
신자유주의와 미국문화를 맹신하는 우익적 298세대던...
기성세대의 코드는 부정을 했지만...


88만원세대와는 다르게...
각자의 개성을 찾기보다는...
이념이나 사회정의를 찾기보다는...
우리세대의 문화 코드만을 맹신한 세대...


뭐... 그나마, 어릴때 외국에 나가서 그런진 몰라도...
아니... 외국에서의 생활이 다른 298세대와는 달라서 그런진 몰라도...
무슨 말을 하는지 너무 잘 알아듣겠고... 이해는 하지만...확실히 별로 공감이 되는 건 없군요.






넷,
알 수 없는 타국에서
알 수 없는 누리꾼이 보내온 글



우연히 들러 이 글을 읽고 조금은 짠한 미소가 나옵니다. 아...잊고 있었습니다. 제가 96학번이었더군요. 학과 문제로 다니는 학교를 그만두고 97학번으로 타대학으로 입학하긴 했지만...96학번이었던 시절은 온통 대모 기억밖에 안 남습니다. 노수석군 사망 후 선배들에 이끌려 밤새 이리저리 캠퍼스에서 난리치던 그 날을 너무나 잊고 있었네요. 호기심 30% 타의 70% (선배들)에 몸담게 된 대모에 너무 배가 고팠던 기억이 납니다. 누군가가 초코파이 상자를 던졌고 선배가 챙겨준 조그만 초코파이하나가 너무 맛있었습니다. 화염병에 울던 제 눈에 담배연기 불어주던 선배 덕에 잠시 흡연기를 가지게 됩니다.


이글이 맘에 와 닿는 이유는.....단지 기억을 더듬어 준 것이라기보단...당시 제 자신의 혼란스러움이 체제적 이유도 있었던 것 또한 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시절 이해되지 않던 교육부의 변덕과 비과학적인 교육시스템의 희생자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 혼자 항의하는 기분으로 제 나름의 공부방식을 고수하기도 했는데, 예, 안먹히데요. 친구들은 참 잘 적응합니다. 바뀌면 바뀌는 대로 잘 따라 가더군요. 이 글을 보니 많은 분들 다 나름 혼란이 있었구나 싶습니다. 상대적으로 반항심이 너무 세진 여인네가 되고 말았습니다. 즐거웠던 대학시절이긴 했지만 혼란과 글쓴 분 말씀대로 '개난장'같은 영상이 오버랩됩니다. 그러고 어떤 것들이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제자신의 문제와 사회적 문제가 오묘히 결합된 학창시절이었군요.


이제 서른 이 넘으신 동기분들에게 갑자기? 한없는 연민이 솟아오르네요. 저는 현재 타국에서 지내고 있어서 많은 것들을 의도적, 자연적으로 잊고 있었습니다. 글 잘 읽고 갑니다. 모두 힘내시길~~






다섯, 96학번 여학우의 편지



감사합니다. 좋은 글 써주셔서..


잊고 지내다가도 어느 순간 생각나려하면 다시 저..속으로 집어넣어..두었던,
점점 내가 겪은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그러나, 결국은...글에서 말씀하신...트라우마.


그 여름 이후 내일이 아니었던듯 생각하며 지냈던 기억이 납니다.
잊을 수 없었던 몇몇 장면들을(머릿속으로 기억하는..) 같이 있었던 선배들이던, 옆에 있던 친구이던 간에 울면서 얘기를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질 못하고...


슬픔보다는 오히려 씩씩하게 때로는 흥분하며 함께 연대에 있었던 선배들과 총학생회선거운동을 하고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선배가 당선이 되고...
그렇게 어지럽게 96년을 보냈네요.


내 인생에서 열정이란 단어는 보다는 조용한 인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데
96년도만큼은 열정 그 자체였던 것 같습니다.


머리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진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네요.
아, 슬픕니다.
그곳에 있던 동안 한가롭게 말타기놀이를 했던 기억도 있네요..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안에서만큼은 별로 힘들지 않았습니다. 배도 고프지않았고, 목이 마르지도 않았고.
탈수증세 막는다고 선배들이 소금을 주기도 했지만 저는 괜찮았었습니다.^^
때때로 옥상에서 들려오는 돌깨는 소리가 조금 혼란스러워지려했지만 그 순간 생각을 멈춰버렸던 것 같습니다.

스스로 혼란스러움을 느끼지 않으려고 그 시간들동안 생각이라는 것을 안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될까 하는 걱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그 이후의 기억들이...홀로 남겨졌을 때..
일부러 등을 밝고 걸어다녔던 진압대때문에 옷에 찍혀있던 발자국과 무슨 자국이냐고 묻던 형사,
옆 철 책상에 머리를 찧기던 남학생, 가방을 뒤져서 나온 치약에서 느껴지는 굴욕감.
하룻밤 경찰서에서 지내며 먹었던 사발면....왜 그 때 그리 주눅이 들었는지...


경찰서에서 나오면서 목이 말라 경찰서앞에 있던 슈퍼에서 사먹은 바나나우유...
그래서 목이 마를 때면 물보다 바나나우유가 생각이 났던 때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일부러 몸이 기억을 하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연대에 정문으로는 들어갈수가 없어서 선배와 함께 택시를 타고 세브란스 병원으로 들어갔었습니다.
그 때, 못들어갔으면 좋지 않았을 까 하는 생각도 해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당시 내가 했던 생각들과 당황스러웠던 기억들을 선배들에게 다 털어놓았으면 좋았을텐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랬었더라면....이렇게 다시 떠올리는 게 겁나지는 않았을텐데요...


아, 죄송합니다. 필요없는 말을 너무 많이 한 건가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위로가 되었습니다..


주> 이 편지를 읽고 1990년대에 대한 회환에 잠기셨다면,
<독설닷컴>에서 제기한 '298세대론'을 위해 언급할 '298세대 아이콘 100'을 추천해 주세요. 
아래 글의 댓글로 남기시면 됩니다.


2008/12/03 - [298세대 아이콘 100] - 386세대와 88만원 세대 중간의, 298세대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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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Favicon of http://blog.daum.net/23mjj BlogIcon 열혈청년 2008.12.09 09: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98학번입니다. 96년 연대항쟁을 고등학교 때 언론을 통해서 접했었고, 그 많은 대학생들이 빨갱이일까 라는 의문을 가졌던 기억이 나네요.
    97년 말 터진 IMF로 양담배를 같이 피던 친구들이 국산담배 디스로 담배를 바꾸고, 대학에 입학해서는 과학생회실에서 흘러나오는 민중가요가 새로웠던 학번입니다.
    IMF 주범 김영삼을 사법처리하라는 유인물이 새로웠고, 가슴이 콩닥거리며 처음 거리로 나섰습니다. 대학에서 집회만 하면 경찰들이 대학을 막고 검문을 했던 기억도 납니다.
    그러면서 연대항쟁에 진실에 대해서 선배들을 통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제 인생에도 변화가 왔죠. ^^;

    기사를 접하면서 제가 아는 96학번 선배들 생각이 나네요.
    각자 자기 갈 길을 가고 있죠. 그 당시의 기억을 가지고 사는 선배도 있고 생활에 치여 사는 선배들도 있습니다.
    오늘 그 선배들한테 연락을 해보고 싶네요. ^^

  3. Favicon of https://poisontongue.sisain.co.kr BlogIcon 소셜미디어의 촌철살인마 독설닷컴 2008.12.09 09: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996년 '연대 사태' 관련 자료입니다.



    인권하루소식 '그때 그 사건' ④ 96년 연세대 사태


    공포의 아수라장, 국가폭력이 남긴 오랜 상처


    5,500여명이 검거되고 482명이 구속된 96년 연세대 사태를 당시 언론은 "도심의 난동"이라 명명했다. 96년 전국을 들끓게 했던 "난동"은 왜 누가 일으켰으며, 어떤 문제를 남겼을까?



    연대 사태는 공안 기획의 산물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박병언 씨(31)는 "연세대 사태는 96년초부터 일관된 김영삼 정권의 공안정국 기획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그 주장의 근거로 96년 개학부터 개시된 경찰의 강경한 시위 진압에 주목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3월 29일, 전경들의 폭압적 진압으로 사망한 노수석 씨 사건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연초부터 팽팽하게 맞섰던 학생과 당국간의 대결분위기는 8월 들어 당국이 8.15행사 불허 방침을 밝히고 한총련 지도부가 장소변경 불가로 맞불을 놓으면서 비등점에 이르렀고, 한총련이 8.15 행사후 해산의사를 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봉쇄 조치를 계속하면서 위기 국면으로 돌입했다. 15일 당국은 "시위 참가 학생 전원을 연행하여 의법조치 하겠다"고 으름장을 놨고, 실제로 밖으로 빠져나가는 학생들을 무차별 연행했다.

    당시 충청총련 의장이었던 설중호 씨는 "오죽했으면 학생들이 '집에 가고 싶다'고 외쳤겠나"고 반문한다. 설 씨는 "아무런 준비 없이 경찰의 봉쇄에 떠밀린 농성을 하다 보니 먹을 것, 마실 것도 부족했고, 여학우들의 경우 생리대마저 부족해 천을 뜯어서 대용하는 형편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박 씨는 특히 농성 3일째인 17일을 잊지 못한다. "경찰측에서 서문을 열 테니 빠져나가라는 연락이 와서 학우들이 환성을 지르고, 서로 환한 표정으로 학생식당으로 가서 3일만에 배를 채우려는 데 경찰이 치고 들어왔다"는 것. 이 전격적인 진압작전에 의해 농성 중이던 학생들은 둘로 쪼개져 이과대와 종합관으로 밀려들어갔다.

    이과대쪽에 있던 박 씨에 따르면 17일 밤 이후 "직격 최루탄이 창문을 부수고 조명탄이 하늘을 밝히는 등 공포분위기에서 안에 갇힌 학생들 중 일부는 '차라리 자살하겠다'고 소동을 부렸고 친구들이 말리는 등 극도로 어수선했다". 최후의 진압작전이 벌어진 20일 종합관 진압작전은 설 씨의 표현에 따르면 "불붙은 바리케이드, 자욱한 연기, 그리고 전경들의 무차별 구타와 욕설" 그 자체였다.


    가능한 모든 인권침해 저질러졌다

    21일 "쑥대밭이 된 종합관"으로 일단락된 연세대 사태는 그 규모만큼이나 공권력이 국민 개개인에게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인권침해를 망라하고 있다. 검문과 연행, 진압과정에서의 폭행과 폭언, 조사과정에서의 고문과 가혹한 처우, 증거조작에 쓸 연출사진은 물론이고, 그 해 정기국회에서 추미애 의원이 폭로했듯 여학생에 대한 검거와 조사 과정에서 빈번하게 행해졌던 성추행과 성폭언까지…. 하나하나 따지는 게 부질없어 보일 만큼 짧은 시간에 압축적으로, 가능한 모든 침해행위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공안광풍 속에 진실은 묻혀졌고, 성추행 혐의로 고발된 전경들은 불기소처분이란 면죄부를 받았다.


    '한총련=좌경'이 면죄부 부여

    이렇게 된 까닭은 무엇보다도 한총련에 대한 색깔 입히기, 마녀사냥이 먹혀 든 데서 찾아야 한다. "한총련은 좌경"이란 말은 그 말을 하는 자와 듣는 이 모두에게 고유한 정치적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경찰은 한총련이 좌경이고 불온하므로 함부로 다루어도 된다고 말했고, 평범한 국민들은 한총련이 무권리 상태로 방치되는 것은 자업자득이라는 '공감 아닌 공감'을 강요당했다. 사상을 이유로 한 집단이 자신들의 전 존재를 부정당해도 아무도 그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불합리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한총련을 이해하자고 나서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마저 덧칠될 것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았다.

    오늘도 그렇듯 한총련을 매도하는 목소리는 여론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사상을 차별하는 구조 위에서 관철되는 권력의 횡포, 소수자를 향해 퍼부어지는 강자의 폭력이라 불러 마땅했다.

    한편으로는 검거자 5,500여명으로 상징되는 사건의 규모 자체도 일정한 역할도 했다. 큰 규모가 필연적으로 인권침해를 불러왔듯, 바로 그 규모의 거대성 자체가 사안이 중대하다는 인상을 심어주어, 경찰이 농성진압과 조사 과정에서 저지른 인권침해를 '사소한 것'들로 치부하게 만들었고, 나아가 "소소한 침해는 불가피했다"는 궤변마저 정당화시켰다. 연대사태가 남긴 큰 문제 중 하나는 '크게 사고 치면 단죄할 수 없다'는 현실적 주장이 사회적으로 다시 한번 확인된 데 있다.

    이에 대해 설 씨는 "악한 것은 악한 것이지, 그 규모에 따라 악행이 선별적으로 용인될 수는 없다"고 논박한다. 소소한 것들은 단죄되면서도 크게 사고쳤다 해서 그냥 넘어간다면, 우리 사회에서 국민을 상대로 큰 악행을 저지르기 쉬운 자들, 곧 공안세력은 사건을 칠 때마다 크게 저지르고픈 유혹을 느낄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공안검찰 공화국으로의 전환

    연세대 사태와 관련해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갈 것은 공안기구들이다. 이전시대 '사찰정치'의 주역이 정보기관이었다면, 문민시대 '공안정치'의 주역은 검찰이다. 박병언 씨는 "연세대 사태를 기획하고 뒤처리한 주역은 공안검찰"이라 지적한다. 이후 공안검찰은 강릉무장공비 침투사건을 계기로 정국을 장악하고, 97년 한총련 이적규정을 주도하면서 좌익사범합동수사본부로 확대 개편되면서 전성기를 구가한다.

    연세대 사태가 일어난 지 벌써 7년이 지났다. 하지만, 그날 연세대에서 '공권력의 만행'을 경험한 개인들은 '감당할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그들에게 있어 "국가가 한 개인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갔을 때의 절망감"이란 떨치기 힘든 "악몽 그 자체"이다.

    [이광길]

    • Favicon of https://poisontongue.sisain.co.kr BlogIcon 소셜미디어의 촌철살인마 독설닷컴 2008.12.09 09: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 글은 2003년, '연대 사태'가 발발한 지 7년이 지난 시점에서 쓰여진 글입니다.

      90년대 학번에게 80년 광주를 경험하게 한 '연대 사태'는 별도 게시판을 만들어 재조명 하겠습니다.
      ('연대 사태'라는 말 대신 적절한 말을 다시 생각해서 붙여야 할 것 같습니다.)

      관련 자료와 기고 부탁드립니다.

  4. 단심군 2008.12.09 10: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반갑네요////전 95학번 연대항쟁은 제2학년때이고, 통일선봉대로서 약 1주일간을 저도 하루하루 여느때와는 틀리게 상황이 변화되는것에 두려움을 느끼며 싸우던 시절이 가슴속에 각인되어 있어요....결국 97년 2월에 쫒기듯 군대로 도망갔구.휴......평생 잊지못할 연대항쟁...

    • 단심군강철 2008.12.09 13: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반갑습니다. 전 97학번이라 연세항쟁을 경험하진 못했지만 언론에서 말하던 주사파라는 소리를 고딩때부터 듣고 다녔었습니다. 서강대총장이 했던 소리라지요? x홍 이라는 양반.. 어쨌든 단심군이란 단어가 무척 반갑게 느껴집니다.

  5. 93+96학번 2008.12.09 10: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주받은 93학번으로 마지막 학력고사의 쓴 맛을 보고 ..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대학에 96학번으로 들어갔었어요. 연대항쟁... 그때 저는 아르바이트로 학비버느라 (비겁한 변명일지 몰라도 ㅡㅡ) 그곳에 있지 않았는데...
    글을 읽다보니 옛날 생각이 나네요. 이젠 서른 중반이 되어버린 제 나이에도 사회에서 자리잡지도 못하고 이러고 있네요.

  6. 계과 2008.12.09 10: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위에 단심군님은 저와 비슷한 위치에 있었군요..^^ 저도 95학번이었고, 96년 여름 잊을 수가 없지요... 정말 누군가의 희생없이는 민주주의를 이룰수 없는걸까요? 아직도 항쟁은 진행중이라 생각됩니다. 모두들 생업에 쫓겨 티는 안나지만 가슴 한구석에 그 열망의 불씨는 남아있으리라 봅니다. 아..대한민국..ㅜㅜ

  7. 96 + 98 2008.12.09 11: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96학번으로 입학을 했지만 한학기만을 다니고...수능을 다시보고 98학번으로 다시 입학한 저는....어느 세대인지....간단하게 말하면...99년에 입대를 해서...인터넷의 피해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제대를 하고나니 PC통신은 사라지고 인터넷이라는 세상이....적응하기 무지 힘들었네요...감히 298세대와 IMF세대 모두를 공감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제가 글재주만 있다면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을텐데....

  8. Favicon of http://minitime.co.kr BlogIcon 힘든75년생 2008.12.09 11: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잘 읽었습니다...75년에 태어난 저는 참 많은 힘든일이 있었네요...94년도에 수능처음시작..2번의 수능...잘못된 진학지도로 좋은점수를 받고도 저멀리 지방으로 보내지고..저보다 성적안좋은 많은 사람들이 좋은대학가고..이때부터 참 많이 인생이 힘들어지더군요..
    그래서. 94년도 1년다니고 96학년에 다시 대학교 진학...그래서 좀 다니다 싶으니...97년 IMF..
    96년 97년 정말 많은 사건사고가 일어나고...힘들게 대학졸업후 취직후...어느정도 안정기를 가지려고 했으나....이제 다시 기우는 나라.....참....75년생이후...태어난 사람들 정말로 힘든일들은 마니 겪고 있네요.....희망을 키워야 하는데...쉽자 않군요....눈물이 납니다..

  9. Favicon of http://blog.daum.net/23mjj BlogIcon 열혈청년 2008.12.09 11: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연대사태는 언론에서 이야기하던 단어이고, 우리는 연대항쟁이라고 불렀습니다.

  10. 이정환 2008.12.09 11: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93학번입니다. 96년도 부산해운대에서 한가로이 바다축제근무 서다가 급히무전을 받고 8월14일쯤 한밤중에 서울로 갔던 기억이 나네요! 부산에 전기동대가 서울로 갔습니다. 3일만 있다가 오면 된다고 들었는데,10일 동안 있었습니다. 연대 정문앞에서 최루가스땜에 방독면 하루종일 쓰고 있었고, 밥먹을때 어쩔수 없이 눈물흘리면서 먹고, 뜨거운 도로위에서 진압복입고 등에는 땀띠가 진물이 되어서 옷에 달라붙어 땀띠약 한통 등에 부은기억이 나네요
    하루에 3-4시간 자고 너무 힘들었습니다.

    • 단심군 2008.12.09 14:19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때 고생많이 하셨습니다. 비록 그당시에는 화염병 대 최루탄이었지만요,.. 그 당시 딸려온 백골중에는 자신은 그냥 방위라고 강변하던 일이 생각나네요....

  11. 98학번 2008.12.09 11: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79년생인 저,,제가 고3때 IMF를 맞았기 떄문에 입시를 치르고 난 후 변화가 있었죠,,,그동안 건축학부, 신방과, 사회학부와 같은 인기학과에 목매던 친구들이 사범대나 교육대, 간호학과 같은 취업위주의 학과를 택했던 게 기억이 납니다..저또한 당대 유망직종이라고 떠들던 사회복지과를 택했고요(알고보니 유망직종이 아니었죠 ㅡㅡ;..저빼고 역시나 친구들의 선택은 탁월했고, 현재 위태 위태한 직장을 다니는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고있죠...그때 원대한(?) 꿈을 갖고 호텔경영학과나 공대를 간 친구들도 대학생활중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다행히 합격해 구청이나,,동사무소에 다들 근무하고 있습니다..다들 열심히 살아온 결과이지만, 스스로 운이 좋았다고들 합니다..아마도 준비없이 IMF를 맞은 96,97학번에 비해 98학번은 선택의 여지가 있었던것 같네요..^^;;

    그렇다고 그렇게 운만으로 된건 아니고요 위기를 안만큼 대학공부에 더 노력하기도 했답니다..그이전에 졸업한 학번들은 명문대만 졸업해도 대기업들이 모셔갈만큼 취업에 여유가있었다고 얘기를 들어온거 비하면,,저희는 취업을 위해 대학생활을 했다고 할만큼 공부했던게 기억납니다..^^;;물론 개인차가 있겠지만,
    어느학번이고,,다 애환이 있는것 같아요,,^^

  12. Favicon of http://cyworld.com/taejiland BlogIcon 김태진 2008.12.09 12: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95학번 입니다... 그러니까 96년도에 군대를 의경자원입대로 가서..미쳤죠..왜 하필 그때 갔는지..그것도 시력도 안되고 허리디스크까지 있는데 시력측정판을 외워서 입대했습니다. 거기다가 연고지가 광주라...ㅡㅠ 다시 그시절로 돌아가면 다시는 그런 결정을 안할테지만요..

    아무튼 자대배치를 받자마자 연대사태부터 시작해서 류재을추모식을 거처 김대중 당선까지 대모를 막아야 했습니다... 개표결과를 새벽까지 기다리면서 혹시모를 한나라당 당사 테러를 위해(내가 가서 직접 테러하고 싶었지만..) 닭장차에서 기다리면서 김대중 당선사실로 더이상 피흘리고 부러지고 고통당하지 않겟다는 사실만으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짧은 2년여의 시간동안 .. 상황나가면 대학생한테 맞고 부대들어오면 고참한테 맞고..
    수없이 오월대와 녹두대와의 싸움으로 엄지손가락은 재생불능으로 반쯤 잘려나갔고 오른쪽 무릎은 쇠파이프로 맞아서 mri같은건 꿈도 못꾸고 치료를 못해서 비만오면 등산만가면 아파서 절룩거립니다.. 그렇다고 대모하는 학생을 원망하진 않았어요..

    류재을 추모식을 하던 그때..
    조선대 앞대로를 막기위해 고가다리 위에서 일주일을 못내려오고 밤새도록 막고 맞고 터지고 타고 쓰러져가면서 대학생들도 우리들도 소리죽여 울었습니다. 확성기를 통해 들려오는 그들의 외침에서.. 슬픔을 느꼇습니다.. 왜 우리가 서로 같았을 학생들이 젊은이들이 서로다른 위치에 있다는것만으로 서로 싸우고 죽고 상처를 입혀야 하는지..

    그렇게 98년에 제대를 해서.. 복학을 하니.. 이건뭐..IMF..
    복학한 애들은 비젼도 미래도 없고 그나마 생각있는 애들은 대학원준비를 하던지 유학을 가던지 공무원준비를 하던지.. 그와중에 저는 벤쳐를 시작했었죠.. 미쳤습니다. 다시생각하면..

    닷컴버블의 끝자락에서 닷컴기업을 만들다니..
    그렇게 몇년을 버티다 중국까지 가서 사업을 망하고 한국에 오니..
    받아 주는곳이 없더군요 ㅡㅠ.....

    왜 이렇게 사서 고생이고 힘들게 살았는지.. 아니 원래 우리 세대가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어정쩡하게 끼어있는 우리세대는
    정말 다양한 경험을 한 세대라 생각듭니다..

    대한민국이 초고속을 성장하는 마지막 풍요를 느끼며 학창생황를 시작해서..
    386세대가 이끌어온 투쟁방식을 그대로 전해 받아 김대중 당선까지 이끌었으며..
    그와중에도 문화의 홍수속에서 살았고.. 사회의 첫발을 IMF속에서 내딛어야 했고..
    이제 겨우 자리를 잡고 애새끼들 키울려고 하니.. 반에 반토막난 내펀드와 끈임없이 오르는 공과금과 계속 밀리는 내 월급과..경제를 휘청하게 만드는 쥐새끼 한마리까지..

    • 단심대장 2008.12.09 16:49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랑 같은 위치에서 서로 적대 관계에서 싸우셨던 분이군요. 지금도 직장에서 동호회에서 서로 적으로 대치했던 사람들과 만나곤 합니다. 그땐 적이였지만 지금은 어찌나 친근함이 들고 할 말이 많아지던지..아무튼 고생하셨습니다.

    • Favicon of https://poisontongue.sisain.co.kr BlogIcon 소셜미디어의 촌철살인마 독설닷컴 2008.12.09 17: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올해가 가기 전에
      한번 서로 만나서 회포를 풀어야할 것 같네요.

      다들 바쁘겠지만...

  13. rainbowkid96 2008.12.09 12: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96학번...전 연대때 참석을 안해서...술먹고 노느라 ㅋ 그래도 그때 지하철역마다 가방검사하던게 생각나네여.학생들 가방뒤지고 ...그리고 저는 생각나는게 98년에 군대를 갔는데
    백일휴가를 나오니 애들이 휴대폰하나씩 들고 다니더라구여.게임방이 생기고 ...
    아무튼 아직도 저는 지금도 온라인게임은 할줄모릅니다.ㅋ ㅋ 스타크래프트도 ㅎ ㅎ
    그리고 96학번하면 수능이어렵게 나왔던것 하고 내신비중이 많이 들어가고 그리고 또 저는 본고사까지봤다는것...암튼 고생많은 학번같아여.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14. Favicon of http://cyworld.com/chihyun7 BlogIcon 박치현 2008.12.09 14: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편지들 잘 읽었습니다. 자신의 세대가 가장 고생했다, 아니면 긍정적으로 많은 경험을 거쳤다, 등 많은 소회들이 있는 것 같네요.

    이념의 끝자락과 이념의 몰락, 이어지는 신자유주의의 가속화
    호황의 끝자락(문화세대)과 IMF몰락의 순간을(88만원세대로)
    엄청난 이념적 경제적 양극단을 동시에 경험한게 96학번 위아래 학번들인 것 같습니다.
    이 속에서 많은 환멸, 트라우마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문화적 풍부성,
    이념적 성찰성(과거 선배들의 주입식 이념이 아닌, 좌우이념에 대한 성찰),
    경제적 다양성의 경험(풍요와 몰락의 동시경험)
    디지털 문화의 개척 및 주도자(물론 이건 다른 세대와 큰 차이는 없다고 봅니다)
    이런 것들이 298세대의 다른 세대와는 다른 독특한 자원이 될 거란 생각이 듭니다.

    연대항쟁은, 이제는 오프라인에서도 한번 이야기를 나눌 때도 되지 않았나 싶네요. 정말 이젠 말할 수 있을 때인 듯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연대항쟁에 대해서 반응이 폭발적일지 생각도 못했네요..

    고기자가 96년 연대의 사진자료나 기사(시사저널?)를 연대폴더 만들면 좀 소개할 수는 없는지요? ㅋ

  15. 아그네스 2008.12.09 14: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96학번, 연대사태 초에 연대 안에 있었고 개인 사정으로 큰 사태가 있던 날 오전, 또다른 집회가 있었던 마로니에로 이동했다가 집으로 내려갔었습니다. 그 때 연대 안에 남겨졌던 친했던 친구 3명이 기억납니다. 두명은 안에 갇혔다가 탈진으로 실려나왔었고, 한 명은 외부로 나왔다가 경찰에 잡혀 경찰서 감방에서 며칠을 보냈었습니다. 새내기 시절 아무것도 모르고 선배따라 나섰다가 그렇게들 됐죠. 지금 제 모습은 비판에 참 약한 사람이 됐습니다. 소위 이유가 있든 이유가 없든 욕먹는 곳에 일하고 있다보니...그렇다라고 말하게 된다면 참 비겁한 일일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그냥 96학번의 이야기라 친근해서...

  16. 허허 2008.12.09 14: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 93학번, 휴학 후 IMF와 함께 졸업해서 지금 11년차 직장인, 진보신당 당원은 아니고 그냥 당비 만원씩 내는 사람. 전대협은 진심으로 인정하고 이해하고 존경하나 솔직히 한총련이 도대체 무엇을 왜 했는지 아직도 모르겠음. 난 93년 당시부터 한총련 하는 짓거리가 촌빨 날려서 무척 싫어했음. 내 기억으로 그때 우리 학교(서울 시내 4년제 대학)에 진성 운동권은 한 줌도 안 됐음. 이렇게 얘기하면 소위 좌파라는 고매한 분들께서 욕을 많이 할텐데 ㅋㅋㅋ 한총련 지금 와서 잘난척 하는거 솔직히... 걔들이 갇혀서 초코파이 달라 생리대 달라 하다가 쳐맞은 것밖에 뭐 했는데. 웃김.

    • 한총련 5기 대의원 2008.12.09 17:49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러게요. 뭐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팔짱끼고 욕이나 하면 됐을 일을.

  17. 풍경지기 2008.12.09 15: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96학번과 92학번 졸업을 같이했는데,바로IMF.
    대학원 경쟁률 최상.. 내주변 대학나온 친구들 지금도 결혼못하고 지내고 있음.
    뭔가 이상한 세상..따스한 가족이 그리워지지만, 삶의 여유마저 없는 세상.. 뭔가 바꿔야 한다.

  18. 푸른하늘 2008.12.09 15: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연대사태는 건대사태에 비하면 조족지혈. 깜도 안되는거 갖고는....
    그리고 연대사태.. 솔직히 그거 보면서 웃었다. 대학생들 별것도 아닌걸로 생쑈한다고..
    건대사태를 겪어보았으면 연대사태는 애들 장난이엇다는걸 알거다.

  19. 에라 2008.12.09 15: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도 기억나. 그때 그 미친 8월달엔 한겨레신문마저 우리를 주사파로 몰았었지. 우린 단지 1학년이었을뿐인데. 피디고 엔엘이고도 모르고 걍 통일하러 가자니까 나섰던거 뿐인데... 그 이후론 한겨레도 잘 믿어. 그래도 망막에 또렷이 남아있는 그림하나는... 박제동인가 장봉군인가가 그렸던 한겨레 그림판... 낙랑절벽 위에, 찢겨진 한총련 깃발에 기대어 주저앉아있는 똘망똘망하게 생긴 남녀 두학생의 그림... 그게 딱 그때의 96학번을 설명하는 그림인거 같아... 자료가 남아있으려나

  20. Favicon of http://trueman.tistory.com BlogIcon 참사람 2008.12.09 15: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97학번입니다. 수능과 논술만으로 대학간 첫 세대였지요. 연대사태를 고3때 바라보면서 기억나는 것이 그 때 수능끝나고 정치경제 선생님께서 고3학생들 전체 집단 토론을 시키셨어요. 저와 3명의 친구들이 그 당시 정권의 부당성과 언론의 일방성과 왜곡을 지적하였고, 나머지 28명은 한총련을 비판하였죠. 참 재미있는 것은 그 때 "체제를 흔드는 행위는 용서할 수 없다"라고 말했던 친구가 대학에 가서 가장 열심히 운동권 활동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운동권활동 하다가 군대를 갔지요.

    고1 때부터 강준만씨 글과 경향신문 한겨레 중앙일보 조선일보를 함께 보면서 언론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96년에 저 연대 사태가 일어나기 한 달전에, 중앙일보지국장과 조선일보지국장 간의 살인사건이 발생합니다. 저는 그 사건과 연대 사태가 맞물리면서 언론의 중요성과 폐단을 함께 경험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가 진정 자유민주주의국가인가라고 생각했었지요.

    다시 앞의 토론으로 돌아가면 결국 4명이 28명과의 토론에서 승리합니다. 왜냐하면 한총련의 행사가 아무리 불법적이라 했을지라도(그것도 그전에 허용해주었던 전례와 비교하면 말이 되지 않지만) 그것을 통제하고 언론에서 전달하는 방식이 일방적이고 사실관계를 왜곡하기 있기 때문에 정권과 언론은 비판받기 충분했다는 것에 대해 28명의 학생들이 수긍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고재열 기자님!! 자주 들어와 글 읽고 갑니다. 우리를 따로 부를 세대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특집이 있어서 좋았습니다. 건필하세요.

  21. 시루 2008.12.28 21: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다 보니 96학번들이 참 어려운 세대를 보냈던 거 같네요.
    전 사실 학교 다니면서는 96하고 너무나 차이가 많이 난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우리 학교만의 특수성이었나?
    몇몇 남자 후배들은 열심히 집회도 나오고 했었는데, 그외의 후배들은 별로 관심도 없고 그래서 정말 1년차이가 다르구나 했었거든요. 암튼 벌써 90년대를 추억하는 그런 나이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 조금은 씁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