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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기자, 여행감독 1호, 재미로재미연구소 소장. 이메일 gosisain@gmail.com 트위터 twitter.com/dogsul 페이스북(페이지) facebook.com/kojaeyoul 독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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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뉴미디어 시대의 새로운 글쓰기

뉴미디어 글라디에이터 | 2019. 11. 18. 07:07 | Posted by 소셜미디어의 촌철살인마 독설닷컴

뉴뉴미디어 시대의 새로운 글쓰기

1) 시를 읽지 않는 시대

사람들은 왜 시를 읽지 않을까? 예전만큼. 이것은 시의 잘못도, 사람들의 잘못도 아니다. 사람들은 다만 다른 방식으로 시를 읽고 있을 뿐이다. 시를 읽지 않는다고 해서 시의 기능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럼 사람들은 어디서 시를 읽나? 바로 소셜미디어다. 단지 짧기 때문만은 아니다. 시를 읽고 공감하듯 소셜미디어의 글을 읽고 공감한다. 사람들이 소셜미디어의 글을 리트윗 하거나 공유하는 그 순간의 마음가짐은 시를 옮겨 적는 마음가짐과 비슷할 것이다.

2) 소셜미디어는 ‘시간의 예술’ 

그럼 사람들은 왜 시 대신 소셜미디어의 글을 읽을까? 소셜미디어는 ‘시간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소셜미디어는 ‘지금 여기 우리’의 이야기를 한다. 시가 가진 보편성과 다른 ‘지금 여기 우리’의 이야기를 하는 특수성이 공감을 낳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소셜미디어의 글은 ‘인스턴트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SNS 시인’으로 불리는 하상욱의 시를 보면 동의할 것이다. 그의 시 ‘애니팡’은 이렇다. ‘서로가 / 소홀했는데 // 덕분에 / 소식듣게 돼’ 모두가 카카오톡으로 쏟아지는 애니팡 초대 공해에 시달릴 때 이를 비틀어 표현한 하 씨의 시는 큰 공감을 샀다. 

하상욱이 트위터 시인이었다면 최대호는 페이스북 시인이다. 그의 시 ‘어차피’를 한 번 보자. ‘사고 싶었던 게 세일할 땐/니가 돈이 없고 // 친구가 오랜만에 쏜다고 할 땐/니가 시간이 없고 // 괜찮은 남자를 길에서 만날 땐/니가 생얼이지’ 

하상욱과 최대호의 공통점은 문단에 데뷔한 시인이 아니라는 점과 시인으로 대접받는 것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들의 정체성은 ‘직장인’에 가깝다(최대호는 시를 발표할 때 취업준비생이었다). 차이점은 길이다. 트위터에서 페이스북으로 무대가 바뀌면서 시가 더 서술적이 되었다. 하상욱의 시가 평시조라면 최대호의 시는 사설시조다. 

3) 현대인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기 

하상욱의 시와 최대호의 시는 내용도 조금씩 다르다. 하상욱의 시가 바쁜 현대인의 애환을 비틀었다면, 최대호의 시는 연애감정에 대한 비틀기다. 1990년대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 '손 끝으로 원을 그려봐 네가 그릴 수 있는 한 크게 그걸 뺀만큼 널 사랑해'로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던 원태연 시인을 연상시킨다. 

그들의 시가 가진 문학성과 별개로 대중성에 주목했다. 블로그와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하면서 10년 가까이 온라인에서의 글쓰기 방식에 대해서 고민해왔던 나에게 ‘정제된 전범’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가장 적절한 길이로, 가장 적당한 시간에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그들의 시는 공감의 한 줄’을 욕망하는 사람들이 참고해 볼만한 텍스트였다. 

4) 펭수 현상이 보여주는 것

하상욱의 시와 최대욱의 시가 나타내는 솔직한 심정 즉 욕망의 목소리는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EBS ‘펭수’에서도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 단지 대상이 사회초년생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을 뿐이다. 사장님에게 절대로 할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인턴사원 그리고 부모가 내세울 것 없는 비정규직 입장에서 ‘아니면 말고’의 심정으로 솔직하게 까발리는 모습 덕분에 2030 세대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나 또한 이슈를 요약적으로 전달할 때 시의 형식을 차용하곤 했다. 이런 식이다. “문창극의 '왜색'/ 국민은 '정색'/ 일본은 '반색'/ 누리꾼은 '검색'/ 새누리당은 '사색'/ 야당은 '혈색'/ 언론은 '질색'/ 중앙일보는 '각색'/ 김기춘은 '모색'/ 일베는 '동색'”

5) 단문에서 중문으로, 중문에서 장문으로

‘독설닷컴’이라는 브랜드로 블로그와 트위터 페이스북을 운영하면서 늘 공감을 고민했다. 수치상으로 보면 나름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블로그 방문자는 2천600만 명, 트위터 팔로워는 28만 명, 페이스북 구독자는 4만7천 명 정도다. 최소한 양적 소통에서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글쓰기의 주무대는 블로그에서 트위터로, 트위터에서 페이스북으로 바뀌었다. 주무대가 바뀌면서 글쓰기의 패턴 역시 바뀌었다. 대충 정리된 패턴은 이렇다. 트위터에는 주로 140자 이내의 단문으로 생각을 정리한다. 트위터글 몇 덩어리를 한 대 묶은 중문을 페이스북에 올린다. 그리고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재정리하고 생각을 풀어 장문을 작성해 블로그에 올린다(요즘은 장문을 주로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린다). 

6) 블로그 글쓰기와 저널리즘 글쓰기의 차이 

블로고스피어, 트위터스피어, 페이스북스피어를 무대로 글쓰기를 할 때 주안점도 달랐다. 블로그에 처음 적응할 때는 ‘공감’에 주목했다. 시사저널 파업 당시 ‘스트리트 시사저널’이라는 팀블로그를 했는데 파업에 관한 내용에는 별로 관심을 주지 않았다. 살짝 비틀어서 파업 노동자가 느끼는 감상을 올렸더니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내용은 사소했다. 위로 혹은 응원을 하러 오는 사람들이 다들 귤만 사오는데 먹기에 벅차니 사과나 배도 좀 사왔으면 좋겠다는 내용이나 매일 밤 집에 혼자 기다리는 딸에게 ‘냉동실에 찐빵 있으니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고 혼자 TV 보다가 자라’는 전화를 하는 한 선배 이야기를 올렸다. 

블로그 글쓰기는 확실히 저널리즘 글쓰기와 달랐다. 저널리즘 글쓰기가 이해와 설득을 목적으로 한다면 블로그 글쓰기는 공감과 교감을 목적으로 했다. 저널리즘의 글쓰기가 낮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창이라면(그 창은 맑아야 한다) 블로그의 글쓰기는 밤의 세계 즉 야경을 만끽하게 하는 창이었다(그 창은 흐려도 상관 없다). 블로그에서는 사건의 전후본말 보다는 ‘그 사건을 겪으면서 어떤 기분이었어?’라는 질문에 답하듯이 풀어 쓴 글을 좋아했다. 공정하고 객관적인 글 보다는 주관적이고 취향적인 글이 소구했다. 자신을 납득시키려는 글 보다는 감성을 나누는 글을 선호했다. 

7) 소셜미디어 글쓰기의 완성은 제목 달기

블로그 글쓰기의 완성은 ‘제목 달기’였다. ‘다음뷰(블로거뉴스)’나 ‘네이버 오픈캐스트’에서 누리꾼들의 추천을 받기 위해서는 제목이 소구력이 있어야 하는데 처음에는 감상적인 제목을 달았다. 그러나 이런 제목은 통하지 않았다. 일종의 허세였다. 가장 잘 통하는 제목은 의외로 사실관계를 기술한 것이었다. 내용에서는 감상적인 것을 선호했지만 감상을 응축한 제목은 기피했다. 

제목 달기가 익숙해졌을 때 조심할 것이 있다. 조금만 유심히 보면 지름길이 보이는데 함부로 걸으면 안 된다. 지름길을 걸을 때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제목을 달 때 양치기 소년이 되지 않아야 한다. 사람들의 관심을 낚기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과장하고 싶은 욕구가 생길텐데 참아야 오래간다. 

8) 소셜미디어 글쓰기는 ‘지금 여기 우리’를 대상으로

어떻게 다루느냐만큼 중요한 것은 무엇을 다루느냐였다. ‘지금 여기 우리’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중요했다. 시의성 있는 글을 신속하게 쓰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요즘도 일베(일간 베스트 저장소) 이용자들이 광화문에서 ‘폭식투쟁’을 할 때는 ‘일베적 인식 체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손학규 전 의원의 정계은퇴 소식에 ‘손학규를 보내며’, 영화 <명량>의 흥행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대한 악평이 쏟아질 때 ‘평론가들이 <명량>에 대해 악평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썼다. 이럴 때는 종합적인 글보다는 ‘원포인트’로 치고 나오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식이다. ‘일베적 인식 체계를 이해하기 위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일베의 인식 체계를 정리했다. 

“간단히 요약하면, '왜 맨날 국가탓만 하느냐, 네가 못나서 당한 일이다.'라는 것이다. 그들은 남의 슬픔을 공감하려 하지 않고, 그 슬픔과 선긋기를 한다. 이런 인식은 '이런 논리'와 맥락을 같이 한다. '너의 불행은 어쩔 수 없어. 나는 4년제 대학인데, 너는 아니잖아! 나는 남자인데, 너는 아니잖아! 우리 부모는 돈이 있는데, 너는 아니잖아! 그런데 왜 모든 것을 국가탓만 해???' 반면 그들은 '국가의 의무 불이행'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왜냐하면 자신은 보호받는 범주 안에 있다고 생각하니까... 계속 보호받을 것이라 믿고... 국가가 저들까지 보호하면 자신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한다.”

9) 블로그는 뉴스 생산의 민주화, 트위터는 뉴스 유통의 민주화

이후 블로그에서 트위터로 관심이 옮겨졌다. 관심이 옮겨진 것은 그 기능의 차이 때문이었다. 블로그가 ‘뉴스 생산의 민주화’를 이룬 곳이라면 트위터는 ‘뉴스 유통의 민주화’를 구현하는 곳이었다. 큰 가능성이 보였다. 이런 SNS가 일반화 된다면 ‘이슈의 패자부활전’이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메이저 신문 1면에 실리거나 지상파 방송 9시뉴스 헤드라인에 방영되거나 포털사이트 메인에 노출되지 않아도 이슈의 확산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때 설정한 나의 역할은 ‘이슈의 미드필더’였다. 블로그를 할 때부터 가장 관심이 있던 것은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사안’에서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사안’으로 관심을 옮기도록 이끄는 것이었다. 이 역할을 트위터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했다. 리트윗 기능을 활용해서 가능했다. 블로그 때보다 더 많은 사람이 ‘뉴스 전달’에 관여했다. ‘나는 전달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배달형 인간’이 본격적으로 출현했다. 

10) 쌍방향 소통에서 3방향 소통으로

인터넷이 쌍방향 소통을 구현해 주었다면 SNS가 구현해 준 것은 3방향 소통이었다. 3방향 소통이란 시민이 뉴스의 생산과 유통과 소비에 모두 관여하게 되는 것이다. <오마이뉴스>가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블로그가 ‘모든 시민은 미디어다’라는 것을 보여주었다면, SNS는 이렇게 생산된 이슈를 유통하는 ‘이슈의 야시장’이었다. 이 ‘이슈의 야시장’에서 기꺼이 장돌뱅이 노릇을 했다. 그리고 큰 장이 서면 여지없이 좌판을 펼쳤다. 

이때 주의했던 것은 하나마나한 얘기를 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이슈를 소개할 때 이를 대중이 쉽고 가볍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신경 썼다. 주로 이런 것들을 고려했다. ‘내가 생각한 것을 선명하게 말해주는 것/ 내 생각을 정리해주는 것, 내가 몰랐던 것을 알게 해준 것/ 새로운 생각을 갖게 해준 것, 나에게 위로가 되는 것/ 나에게 기쁨을 주는 것’ 이를테면 정몽준 후보가 서울시장 선거에서 버벅거릴 때 ‘박근혜는 박근혜를 연기할 줄 아는데, 정몽준은 정몽준을 연기할 줄 모른다’라고 정리해주면 사람들은 공감한다. 

11) 소셜미디어는 리액션의 예술

트위터는 ‘리액션의 예술’이 중요했다. 나의 글에 대한 반응, 그 반응에 대한 반응, 반응의 반응에 대한 반응… 이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반응의 고리가 핵심이었다. 단순히 자기 생각을 기술하는 방식보다는 생각을 밝히고 의견을 묻는 글에 반응이 활발했다. 한국 사람들 특유의 ‘남의 일에 간섭하기’를 긍정적으로 이끌어내는 한국적 커뮤니케이션 패턴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이슈의 야시장’을 활성화 시켰다. 

12) 이슈의 야시장과 괴담의 문제

‘이슈의 야시장’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괴담이었다. ‘괴담은 꽃일 뿐 뿌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었다. 괴담 속에는 민심이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역사에서는 괴담이 살아남는다. 권력자를 모욕했거나, 이단적으로 들렸거나, 정권의 권위를 약화시킨 말들이 처벌을 받는 과정에서 문서에 기록되기 때문이다. 그 기록을 살펴보면 우리가 괴담에 주목해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패턴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트위터도 총선과 대선을 거치면서 내리막을 걷게 된다. 국정원 댓글 사건 등으로 ‘이슈의 시궁창’이 되자 사람들이 이 야시장을 떠나기 시작했다. 트위터의 하락세와 괘를 같이하며 페이스북의 상승세가 두드러졌다. 이때부터 페이스북의 중문 쓰기에 집중했다. 초기에는 트위터에 올린 글 3~5편을 모아 중문을 구성했는데 나중에는 메인 무대를 페이스북으로 옮겼다. 

13) 블로그 트위터와 다른 페이스북

블로그가 성을 쌓는 곳이라면 트위터는 길을 내는 곳이었다. 성에서는 자아가 강해지고 길에서는 소통능력이 커진다. 페이스북은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길을 내는 곳이었다. 두 가지 모두를 요구했다. 트위터를 메인으로 하고 페이스북을 연동했을 때는 스팸 취급을 당했는데, 페이스북을 메인으로 하고 트위터로 연동하니 무게감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뉴뉴미디어’를 활용할 때는 소통의 방식이 변한 것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14) 부담스럽지 않게 살짝 비틀기

블로그와 트위터를 거쳐 페이스북까지 이어지는 내 글쓰기의 패턴이 있었는데 바로 ‘살짝 비틀기’였다. 사람들은 직접적인 표현에 지쳐 있었다. 그들이 여유를 가지고 글을 읽을 수 있도록 틈을 만들어 줄 필요가 있었다. 그때 활용한 방식이 바로 ‘살짝 비틀기’다. 이런 식이다. 우파 논객 변희재에게 갑작스럽게 ‘패전선언’을 하면서 그 맥락을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변희재에게 졌다. 나는 변희재와 바둑을 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변희재는 나와 알까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알까기에는 재주가 없다. 알까기로 이기고 싶지도 않다. 그러니 기권하겠다. 내가 졌다. 변희재가 바둑을 두러 오면 그때 상대해 주겠다.”

비틀기는 유희다. 처음 언급한 하상욱과 최대호의 시에서 중요했던 것도 바로 유희적 요소다. 세월호 참사 때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자신의 안위만 살핀 공직자들을 ‘대한민국 십이지 진상’이라는 테마로 이렇게 비틀었다. 

‘박근혜대통령 - 패션이 먼저다/ 김문수지사 - 시가 먼저다/ 유병언 - 사진이 먼저다/ 교육부장관 - 라면이 먼저다/ 안행부 국장 - 기념사진이 먼저다/ 새누리당 후보 - 폭탄주가 먼저다/ 송영선 - 공부가 먼저다/ 어버이연합 - 종북사냥이 먼저다/ 청와대 - 지지율이 먼저다/ 해경 - 언딘이 먼저다/ 소방서 - 도지사가 먼저다/ 언론 - 추측이 먼저다.’

15) 당신이 이용하는 미디어가 당신 자신이다

글쓰기와 관련한 나의 고민은 SNS와 같은 ‘뉴뉴미디어’의 성격 규정이다. 미디어학자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가 메시지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을 SNS에 응용하자면 “당신이 이용하는 미디어가 당신 자신이다”라고 변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무료할 때 클릭하는 미디어가 무엇인가? 당신이 맨 처음 글을 올리는 곳이 어디인가? 그것들을 되짚어 보면 당신이 보일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한 번 자문해 보자. 

‘당신은 아고라형 인간인가? 블로고스피어형 인간인가?/ 페이퍼형 인간인가? 9시뉴스형 인간인가? 라디오형 인간인가?/ 포털형 인간인가? 카페-커뮤니티형 인간인가?/ 트위터형 인간인가? 페이스북형 인간인가?/ 네이버 밴드형 인간인가? 카카오스토리형 인간인가? 인스타그램형 인간인가? 아니면 사이버 검열의 시대에 카카오톡을 그냥 이용하는가? 아니면 텔레그램으로 이주했는가?’  

16) 올드미디어가 뉴뉴미디어 

미디어 이용행태는 많은 것을 말한다. 미투데이를 이용하는 세대와 트위터를 이용하는 세대는 달랐다. 좌우의 성향 차이만큼 세대 차이도 중요하다. <맥가이버>를 아느냐, <프로즌 브레이크>를 아느냐에 따라 공감의 여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플랫폼이 달라지면 전달하는 내용도 달라진다.  카카오스토리와 밴드에서 주로 링크되는 글들은 트위터나 페이스북에서 주로 링크되는 글과 다르다. 그래서 뉴뉴미디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올드미디어는 뉴미디어다’라는 명제다. 바꿔 말하면 올드미디어를 보면 뉴미디어가 보인다. 올드미디어에서 '검증'된 것은 뉴미디어에서 '재확인'된다. 빨래터가 카스가 되고 밴드가 된다. ‘좋은생각’은 ‘밴드’와 ‘카스’로 전파된다. ‘리더스다이제스트’를 읽던 마인드가 ‘허핑턴포스트’로 이어진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단지 새로운 전달방식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새로운 전달방식을 활용한 글쓰기 고민은 ‘오래된 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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