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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세대 10장면, 외쳤노라, 이겼노라, 무너졌노라

298세대 아이콘 100 | 2008.12.06 08:49 | Posted by 소셜미디어의 촌철살인마 독설닷컴


 
298세대론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전에
386세대에 대해 썼던 글을 먼저 올립니다.


<시사IN>에 썼던 기사인데
시간이 좀 지난 기사라
블로거뉴스에 포스팅은 하지 않고
공개만 하겠습니다. 






시사IN [24호] 2008년 02월 25일  


노무현 대통령 퇴임으로 386 세대도 역사의 한 페이지를 마무하게 되었다. 우리 현대사에서 20세기 마지막 페이지와 21세기 첫 페이지를 장식했던 386 세대. 그들의 행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열 장면을 통해 386이 어떤 시대를 살아왔는지 살펴보았다.  
 
 
386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노무현 정부 실정의 원흉’이라는 비난을 듣는 ‘청와대 386 참모’를 비롯해 386 세대 정치인을 향해 비난이 쏟아지는가 하면, ‘젊은 피 수혈론’을 내세우며 그들을 발굴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여전히 ‘386은 민족적 자산’이라고 추어올린다.



386, 이 말은 원래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30대를 일컫는 단어다. 이제는 그들 대부분이 40대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시효가 지났지만, 여전히 386은 고유명사로 사용된다. 그러나 뉘앙스에서는 분명 이전과 차이가 난다. 한때, 다소 부정적 의미로 통용된다.


 
노무현 대통령 퇴임으로 386도 역사의 한 페이지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물론 아직도 우상호 대변인과 이기우 대표 비서실장 등 386 의원이 손학규 통합민주당 대표의 측근으로 신야권의 구심이다. 이명박 당선자 주변에도 정태근·김성식·김해수 등 386 참모가 활약한다. 그러나 확실히 이전의 무게감과는 다르다.



분명한 것은 이제 그들 스스로도 386이라는 이름으로 더 이상 한 묶음으로 묶이려 하지 않고 함께 무엇을 도모하려 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20세기 마지막 페이지와 21세기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던 386은 이제 재규정되어야 할 당혹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다. ‘386’이라는 아이콘을 역사 속으로 보내며 그
들이 어떤 시대를 살아왔는지 그들의 행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열 장면을 반추해 본다.



장면 1.  1980년 광주에 대한 원죄


첫 장면은 광주에서 시작한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원죄 의식은 386 세대가 편안히 공부하고 연애하며 대학 생활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소설가 신경숙(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 82학번)이 “행복한 순간에도 ‘내가 지금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좋은 것을 가져도 ‘내가 이렇게 좋은 것을 가져도 되나’라고 죄의식을 느꼈다”라고 표현했던 것처럼 역사와 시대에 대한 부채 의식이 충만한 시기였다.

 
 
1981년 어느 날, 연세대학교 한 문학 동아리 모임에서 빼어난 미모의 영문과 1학년 여학생이 같은 동아리 동기인 호남형의 국문과 1학년 남학생에게 사귀자고 호기롭게 제안했다. 나중에 정치인이 된 남학생은 그 순간을 추억하며 “부끄러웠다. 왠지 연애 같은 것에 빠져서는 안 될 것 같아 거절했다”라고 말했다. 낭만을 거세당한 캠퍼스에 서서히 투쟁의 열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대학생들은 광주에 대한 원죄 의식을 미국의 책임을 묻는 것으로 매듭을 풀어나갔다. 그렇게 해서 일어난
일이 바로 1985년 5월의 서울 미국 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이다. 미국 문화원 농성 사건은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자 전학련 의장으로 농성 사건을 기획했던 김민석(서울대 사회학 82학번)과 점거농성단 대표였던 함운경(서울대 법대 82학번)의 이름을 깊이 각인했다.



장면 2.  1987년 6월 항쟁


1987년 1월 발생한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으로 민주화의 열기는 정점으로 치닫는다. 서울대생 박종철씨가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조사받던 도중 고문으로 숨진 이 사건은 5월 명동성당에서 열린 5ㆍ18 추모 미사 때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박종철군 고문 치사 사건은 조작되었다”라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왔다. 전두환 대통령이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국민의 개헌 요구와 민주화 요구를 묵살하는 내용의 ‘4·13 호헌조처’를 발표해 반발을 사던 국면이었다. 6월8일 연세대생 이한열씨가 최루탄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면서부터는 ‘넥타이 부대’라 불리던 회사원들도 동참했고 결국 6ㆍ10 민주화운동으로 분출되었다. 6월 항쟁은 사회 각 분야의 민주화를 촉발했다. 노동운동·문화운동·지역운동 등 각 영역에서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장면 3.  1991년 분신 정국


1989년 옛소련 붕괴와 더불어 운동의 열기는 한풀 꺾인다. 다시 불이 댕겨진 것은 1991년 발생한 명지대생 강경대씨의 사망 사건이었다. 죽음이 줄을 잇는 ‘분신 정국’이 시작되었다. 전남대생 박승희(4월29일), 안동대생 김영균(5월1일), 경원대생 천세용(5월3일)의 분신에 이어,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가 의문사했고(5월6일),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분신(5월8일), 노동자 윤용하 분신(5월10일), 시민 이정순 분신(5월18일), 노동자 정상순 분신(5월22일), 성균관대생 김귀정 시위 도중 압사(5월25일), 전남 보성고생 김철수 분신(6월1일) 등이 이어졌다.



김지하 시인이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 치워라’는 글을 써 분신 정국을 비난한 것을 시작으로 학생운동에 대한 질타의 목소리가 힘을 얻었다. 지난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의해 대필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 유서 대필 사건에 대한 조작 발표도 이즈음 나왔다. 진보 세력이 타격을 입은 대미는 외국어대에 고별 강의를 갔던 정원식 총리가 달걀과 밀가루 세례를 맞은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대학 운동권의 ‘신화와 전설의 시대’는 저물게 된다. 1993년 한총련이 출범하지만 대안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박홍 서강대 총장의 발언으로 촉발된 주사파 공격은 한국판 매카시즘을 일으키며 학생운동을 더욱 위축시켰다.



장면 4.  1994년 참여연대 창립


대학을 졸업한 386은 ‘대안적 사회 진출’을 고민했다. 새로운 좌표를 설정하려는 움직임이 여기저기서 일기 시작했는데 참여연대는 대표적 성공 사례다. 김기식씨(서울대 인류학 85학번) 등은 1993년 ‘참여민주주의를 위한 사회인 연합’을 조직하고, 여기에 박원순 변호사와 조희연 교수 등을 끌어들여 이듬해 참여연대를 조직한다. 서경석 목사 등 명망가 중심의 시민운동을 한다는 비판을 들었던 경제정의시민실천연합과 달리 참여연대는 시민의 참여에 주안점을 두었다.



시민사회뿐만 아니라 각계 조직화 사업이 진행되었다. 노동자 대투쟁의 성과는 1995년 민주노총 출범으로 결실을 본다. 이후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등 전문 분야에서 시민운동 조직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출범했다.



또한 사회운동의 성과물이 학술 활동을 통해 정리되고 완결되었다. 박세길 교수의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이진경씨(본명 박태호, 서울대 사회학 82학번)의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 박명림(고려대 정외학 82학번) 박사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은 대표 성과물로 꼽을 수 있다.



사회 분야별로 각개약진하는 과정에서 386이라는 용어도 만들어진다. 1996년 11월의 어느 날 한창민(연세대 철학과 82) 송영길(연세대 경영학 82학번) 김종민(서울대 국문과 83학번) 등 ‘열린공간 30’ 멤버는 동 세대인이 함께 어울릴 카페를 마련했다. 카페 이름을 짓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386’으로 규정할 수 있다며 이 용어를 처음 쓰기 시작했다. 학번으로 세대를 구분해 노동운동·농민운동 따위를 포괄하지 못한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이 세대를 규정하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장면 5.  1998년 김대중 정부 젊은 피 수혈


386 세대가 사회 전면에 등장하게 된 계기는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대중조직 능력 등 정치가 요구하는 자질을 가지고 있었던 386을 ‘젊은 피 수혈’이라는 이름으로 적극 껴안았다. 1991년 김민석 전 의원이 구 민주당에 합류하면서 물꼬를 튼 이후 386은 정치권에서 하나의 물줄기를 형성했다. 여기저기 산개하던 386은 자연스럽게 정치권으로 수렴되었다. 총학생회장과 총학생회 간부는 국회의원과 보좌관으로 다시 만났다.



프랑스의 68세대나 미국의 반전 세대가 이후 정치의 주역이 되었듯 386도 자연스럽게 새 정부의 주역으로 떠오른다. 이들이 정치 세력화하는 과정에서는 응집된 시민운동의 역량도 도움이 되었다. 총선시민연대가 꼽은 낙천·낙선 대상자들이 총선에서 대거 탈락하면서 386 정치인은 구 정치인을 대체하며 정치권에 본격 진입할 수 있었다.



장면 6.  1990년대 후반의 벤처 붐



정치 분야에서 386이 ‘젊은 피 수혈’의 수혜주였다면 경제 분야에서 386은 벤처 붐의 혜택을 누렸다. 인터넷과 IT 산업 분야에서 이들은 신지식인으로 각광받았다. 허진호(서울대 계산통계학과 81학번) 이정근(고려대 금속공학과 83학번) 장영승(서울대 컴퓨터공학과 82학번) 등이 투신해 벤처 1세대를 구축했다.



외환위기의 된서리를 맞고도 대기업을 뛰어나와 벤처기업을 창업할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386 세대의 특성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례였다. 성공에 대한 강한 열정과 확신은 그들을 ‘신기술의 바다’로 이끌었다. 벤처 거품이 걷히면서 많은 벤처기업이 신나게 터뜨렸던 샴페인 뚜껑을 다시 닫아야 하는 상황이 왔지만 이들은 끝까지 살아남아 코스닥의 주축이 되었다.






장면 7.  김민석 민주당 탈당


현실 정치에 진입한 386은 기대를 충족시키기보다 실망감을 주는 경우가 더 많았다. 대표 사례가 바로 김민석 전 의원의 철새 행각이었다. 2002년 지방선거 때 서울시장 후보까지 지낸 그가 대선 와중에 지지율이 낮은 노무현 후보를 버리고 정몽준 후보 진영으로 자리를 옮기자 네티즌은 ‘김민새’라며 비난했다.



김민석 전 의원의 행위는 청와대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세배를 했던 허인회씨(고려대 정외과 82학번)의 행위와 광주 5?18 기념식에 갔다가 단란주점에서 술자리를 가졌던 386 의원들의 행각과 더불어 386 정치인의 부도덕하고 기회주의적인 처신의 대표 사례로 꼽혔다. 그들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 컸기에 이런 부적절한 행위가 주는 타격도 컸다.



장면 8.  2002년 노무현 대통령 취임


노무현 정부 탄생과 함께 386은 명실상부한 우리 사회의 주역으로 떠오른다. 안희정(고려대 철학과 83학번)씨와 이광재(연세대 화학공학과 83학번) 의원은 ‘좌희정 우광재’로 불리며 노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주목되었다. 스스로 과대 평가되었다고 해명하지만, 386은 노무현 정부의 주축이었다. 당이 아닌 캠프 중심으로 선거운동을 진행했던 노무현 대통령은 당선된 뒤에도 386을 중용했다.

     
 
그러나 정권 말기 ‘반노 정서’가 커지면서 이들은 정치 위기를 맞는다. 통합민주당 내에서도 ‘친노 세력’은 비토 대상이 되었다. 안씨와 이 전 의원도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이 의원은 국세청 인사 청탁에 관여한 사실이 최근 검찰 수사 과정에서 밝혀져 옹색한 처지이다. 안씨는 2002년 대선자금 관련 전과 때문에 공천이 불안한 상황이다. 1987년 고대 애국학생회 사건과 1988년 반미청년회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그는 학생운동 시절 주로 지하 서클을 중심으로 활동해왔다. 그가 정치의 오버그라운드로 나올 수 있을지 관심을 모은다.



장면 9.  2004년 총선 승리


탄핵 역풍이 거셌던 2004년 총선을 통해 386 정치인들이 대거 국회에 입성한다. 열린우리당에서는 이광재 의원을 비롯해 윤호중(서울대 철학과 81학번) 김현미(연세대 정외과 81학번) 이화영(성균관대 사회학과 81) 이기우(성균관대 금속공학과 85학번) 조정식(연세대 건축공학과 82학번) 등이 당선되었다. 탄핵 역풍으로 당선되었다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지만 이들은 당내 민주화와 정치 개혁을 주창했다.



그러나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개혁 입법은 좌절되거나 왜곡되었고 당의장이 아홉 번 갈리는 혼란 속에 열린우리당호는 결국 좌초했다. 힘을 결집해 하나의 목소리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386끼리도 한목소리를 못 냈는데 이런 분열은 10년 전에도 예고되어 있었다.



이들의 10여 년 전 명함을 꺼내보면 분열이 예고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김민석 의원은 ‘젊은 한국’ 대표로, 우상호 의원은 청년정보문화센터 소장으로, 이인영 의원은 한국청년연합회 상임준비위원장으로, 함운경씨는 한국정치발전포럼 대표로 찍혀 있었다. 그들은 늘 ‘짱’을 원했다.



먼저 승차했던 386 정치인이 거둔 점수가 시원찮아서 뒷차를 타야 하는 386 정치인은 지금 불안하다. ‘가는 곳마다 이기는 선거 전문가’로 불린 김두수(고려대 행정학과 82학번)나 ‘당대 최고의 30대 전략 기획가’로 꼽힌 이재경(고려대 정외학과 84학번)이나 18대 총선에서 공천과 당선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장면 10.  뉴라이트 운동


2004년 한나라당이 총선에서 참패한 뒤 386 중 보수로 전향한 일부 세력은 뉴라이트라는 새로운 깃발을 올렸다. 뉴라이트는 히트 상품이었다. 신지호(연세대 경제학과 81학번) 구해우(고려대 법학과 83학번) 최홍재(고려대 신문방송학과 87학번) 등은 각종 뉴라이트 단체를 조직하고 우파 이데올로그를 새로이 정립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젊은 피 수혈’을 할 때와는 상황이 현저히 달라졌다. 한나라당은 그들의 몫을 인정하지 않았다. 18대 총선에 공천 신청을 했지만 대부분 공천의 벽을 넘지 못했다. 스타 뉴라이트 활동가들은 대부분 버림받고 이명박 후보의 선거운동에 올인했던 사람들만 몇 명 구제받았다.



다시 첫 장면으로 되돌아가 보자. 그 여학생과 남학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낭만적인 여학생은 소설가가 되어 민주화운동의 후일담 소설로 인기 작가가 되었고, 멋없는 남학생은 민주화운동 경력 덕분에 국회의원이 되었다. 386 수혜 그룹인 이들은 시대의 상처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



그러나 대다수 386은 그렇지 못했다. 젊음을 담보잡힌 채 거리에 나왔고 그들 중 몇은 강제 징집당한 뒤 의문사기도 했다. 그들의 희생으로 역사는 한 걸음 더 나갈 수 있었지만 그들은 역사의 승리감을 맛보는 것으로만 만족해야 했다. 군부독재를 종식하고 문민정부를 일구어냈고 여야 정권교체를 성공시켰으며 참여정부를 만들어낸 주역이라는 것 외에 돌아온 것은 없었다.



일부 총학생회장 출신이, 정치권에 투신한 386이 영광을 독식했다는 비난도 들었지만 욕도 그들이 도맡아 먹었다. 이제 역사와 386은 서로 빚진 것이 없다. 이제 다시 386은 맨얼굴로 역사와 마주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우리 현대사에 무엇을 새로 쓰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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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난알아요 2008.12.06 11: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정식으로 시작해서 개뼈다구로 끝난 느낌이네요.

    정치에 몸을 던진 그들에게 남은건 욕지기와 금뱃지뿐....

  2. 떠돌이 2009.02.05 11: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지하 시인이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 치워라’는 분신 정권을 비판한게 아니라
    분신 하는 젊은 사람들을 비판하여 전두환 집권을 두둔 하였다는데....
    "만화 전두환 참조"

  3. 나그네 2017.08.02 14: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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