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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고재열 기자입니다. 이메일 gosisain@gmail.com 트위터 twitter.com/dogsul 페이스북(페이지) facebook.com/kojaeyoul 페이스북 페이지는 facebook.com/kojaeyoul '믿지마 연애상담' https://story.kakao.com/ch/dogsuldotcom/app 독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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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카기행에서 건진 질문들…

취향의 발견/예비 여행작가 | 2016.06.02 22:33 | Posted by 소셜미디어의 촌철살인마 독설닷컴



학자의 여행은 답을 남기지만 저널리스트의 여행은 질문을 남긴다


학자의 여행은 답을 남기지만 저널리스트의 여행은 질문을 남긴다. 지난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APOCC)의 말라카기행은 좋은 질문을 제법 건진 멋진 여행이었다. 행사를 주최한 APOCC의 주강현 원장은 ‘해협적 상상력’을 가져볼 계기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그것 이상이었다. 마호메드의 도시 쿠알라룸푸르, 정화의 도시 말라카, 쑨원의 도시 페낭, 마하티르의 도시 랑카위가 보여준 것은 ‘이슬람과의 공존 가능성’이었다.

 

각각의 도시들이 보여준 특성이 명확했다. 여기에 하나를 더한다면 리콴유의 도시 싱가포르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싱가포르는 원래 말레이시아연방의 한 주였다). 이들 도시들에게는 일정한 법칙이 보였다. 말레이시아연방 주(혹은 도시)의 경제력 수준은 대체로 화교 비율에 비례했다. 화교 비율이 가장 높은 싱가포르가 가장 높고 50% 이상인 쿠알라룸푸르와 페낭이 그 다음이었고 다른 주와 도시들이 그 뒤를 이었다. 마하티르의 랑카위는 예외였다. 그래서 흥미로웠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 건진 질문은 ‘말라카해협에 장보고 장군이 다녀갔다면 우리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라는 것이었다. 무역풍과 해류의 방향 때문에 아마 불가능했겠지만 ‘그가 이곳을 다녀갔다면 우리의 상상력이 얼마나 확장되었을까?’하는 생각을 하니 깊은 아쉬움이 남았다. 서구 열강이 이 해협을 각축할 때 그런 사실이라도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다음 질문은 ‘왜 우리는 이슬람의 폐쇄성에만 주목하고 개방성은 보려 하지 않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쿠알라룸푸르의 밤은 활기찼다. 이슬람의 유쾌한 타락을 목격했다. 원리주의의 사슬을 벗어난 무슬림들이 쿠알라룸푸르의 밤에 어떻게 숨통을 트는지 엿볼 수 있었다. 쿠알라룸푸르의 밤에는 마호메드도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들의 왕성한 소비력을 보면서 할랄푸드 공장을 막는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의 폐쇄성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말라카의 문화 역주행’에 대해서도 새로운 질문이 생겼다. 말라카 해협의 문화는 위에서 아래로 전파되었다. 힌두와 불교가 내려왔고 이슬람이 크게 내려왔다. 그 길은 서구 열강이 아시아를 잠식해가는 길이기도 했다. 중국이 바다로 영역을 확장하는 길은 방향이 달랐다. 아래에서 위로 해협을 거슬러 올라가는 방향이다. 정화의 원정길이 그랬다. 이 영향의 방향이 지금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 지가 궁금했다.


마지막은 바다의 여신에 대한 질문이다. 이번 답사에는 마조신앙 연구의 권위자인 고혜련 교수가 함께 해 여행의 재미를 더해주었다. 외국 여행을 갔을 때 되도록 그 나라의 샤먼(무속)과 관련될 것을 보려고 노력한다. 샤먼에는 그들이 가졌던 공포의 원형과 욕망의 원형이 있기 때문이다. 샤먼을 보면 그 나라 사람들의 특징을 이해하기가 쉽고 우리와의 공통점을 찾기도 쉽다. 비록 전통 샤먼이 종교에 묻히더라도 그 흔적은 남는다. 우리 절에 산신을 모신 ‘삼성각’이 있듯이 중국의 사원에는 마조여신을 모신 ‘마조사당’이 있다. 왜 바다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은 ‘구원의 여신’을 섬기는가 하는 것이었다.

 



# 정화의 도시, 말라카

 

말라카는 기억을 파는 도시였다. 융성했던 무역항으로서의 역할은 싱가포르에 빼앗기고 이제는 관광지로 안착해 있었다. 동서교류의 흔적은 융합된 문화로서 관찰할 수 있었다. 융합의 기억 덕분인지 말라카인은 융합의 문화를 체화시켰다. 그것이 무엇이든, 좋은 것이면 취한다는 개방성이 돋보였다. 다양한 기억이 있는 도시이기 때문에 말라카는 관광도시로 흥할 수밖에 없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말라카 뒷골목의 꼴라쥬로 오려붙인 낙서가 인상적이었다. 자세히 보면 불교의 탱화와 같은 모티브였다. 서양 도시의 그래피티 보다 몇 수 위였다. 말라카는 요즘 말로 ‘디덩(디테일 덩어리)’이었다. 꼼꼼히 살펴보면 재미있는 것이 많았다. 종교 신자 추이가 변하면서 힌두양식의 건물이 이슬람사원으로 쓰이는 경우도 보였다.


여러 세기의 과거가 중층적으로 펼쳐진 도시가 바로 말라카였다. 그런데 그 기억의 기점에 정화가 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시진핑이 새로운 정화 장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대국굴기’를 내세운 중국의 해양 진출이 본격화 되고 있는데 말라카는 그를 21세기의 정화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정화와 함께 말라카 중국인의 구심이 되는 것은 마조여신이었다. 뱃사람이 죽음 직전에 부르는 신이 바로 마조여신이다. 기록에 의하면 마조는 10세기 경 메이저우다오(湄洲岛, 미주도)에서 살면서 마을사람들을 돕는 데 평생을 헌신하고 난파한 배의 생존자들을 구조하려다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그녀를 기리는 뜻으로 마을 사람들이 사당을 지어 바치면서 마주를 여신으로 숭배하는 신앙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고려에 파견된 송나라 사신 서긍이 흑산도와 가거도 사이 바닷길에서 돌풍을 만나 표류할 때 찾았던 신도 바로 마조여신이다. 송나라 휘종은 마조여신에게  천비(하늘의 왕비) 작위를 주기도 했다. 청나라 때 ‘천상성모’로 봉해지기도 했다. 


마조신앙은 동중국해 연안을 따라 두루 관찰되는 민간신앙으로 뱃사람의 안녕을 위해 마조여신을 섬기는 것이다. 마조신앙은 중국 주변국에도 두루 퍼져있다. 대만은 물론 일본에서도 관찰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마조신앙이 한국에서는 거의 관찰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차이나타운에서 관찰되는데, 인천 차이나타운 중화회관 옆 청나라영사관 자리에 사원이 있는데 그 신전에 마조신앙을 보여주는 향로가 있다고 한다.


대체로 자연환경에 의한 영향이 큰 해안지역에서 민간신앙이 강하다. 해안지역에서는 주로 여성을 형상화한 신이 많다. 마조여신을 섬기는 곳도 있고 관음상을 세우고 관음신앙을 간진한 곳도 있고 우리나라 제주도처럼 할망의 전설이 있는 곳도 있다. 변덕스러운 자연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샤먼은 주로 여성이 맡는다. 여성 중에서도 할머니인 경우가 많다. 일본 동북지역에서는 할머니 중에서 눈이 먼 장애인할머니를 샤먼으로 대접한다. 남성보다 약자인 여성을, 그 중에서도 약자인 할머니를 그리고 장애인을 샤먼으로 소환해 사회의 통합을 꾀한다. 샤먼을 보면 권력을 견제하는 방식과 권력의 부작용을 보완하는 방식이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 쑨원의 도시, 페낭

 

페낭의 바다는 생각보다 맑지 않았다. 조수 간만의 차가 크고 뻘이 많아서 바다색이 조금 탁한 편이었다. 휴양지라고 보기에는 도시가 너무 발달해 있었다. 쑨원이 신해혁명의 기반을 다진 도시 페낭은 말라카보다 영악했다. 중계무역의 기능을 싱가포르에 빼앗겼지만 그들은 전자산업으로 지정학정 특징을 잘 살려냈다. 교역이 유리한 이점과 휴양 도시 특유의 장점을 살려 글로벌 기업의 리서치센터를 유치했다.

 

페낭은 제주도의 4분의1 크기지만 인구는 제주도의 두 배가 넘는다(현재 150만 명 정도). 우리는 잘 모르지만 페낭은 ‘아시아의 실리콘밸리’로 통하는 도시다. 각종 지원제도를 제공하는 자유산업단지에 인텔, 모토롤라, AMD 등의 다국적 전자기업들이 R&D 센터를 구축해 두었다. 그래서 페낭은 외국인 노동자가 가장 많은 도시로 꼽힌다. 우리 교민도 2천여 명 정도 있는 것으로 추산한다(등록된 교민은 900여 명 정도). 


이 페낭시의 중국인 비율은 70%가 넘는다고 한다. 제티 수상가옥에서 가난하게 살았던 이 중국인들은 이제 페낭시의 고층아파트들을 두루 점유하고 있다. 중국인들의 이주는 집단 이주였다. 페낭에도 ‘구씨 집성촌’을 비롯해 여러 집성촌을 볼 수 있다. 각각의 집성촌은 각자 한 가지 산업을 특화시켰고 조상을 모신 사당을 구심점으로 뭉쳤다. 화교가 어떻게 세계 여러나라에서 안착할 수 있었는지 그 비결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페낭항은 싱가포르에 버금가는 동남아시아의 물류허브로 거듭나고 있다. 말라카가 단순히 관광도시로 머무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페낭은 원래 서구 열강이 아시아에 진출할 때 인도의 고야를 출발한 배가 반드시 정박하던 항구였다. 페낭에는 현대건설이 만든 총년장 13.5km의 페낭대교가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현대건설 CEO시절 건설한 바로 그 다리다. 그런데 다른 쪽에 중국 기업이 만든 현대식 대교가 있어서 묘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중국의 번창은 페낭에서도 확인되었다.


페낭의 조지타운에서 영국의 거문도 점령사건을 떠올렸다. 마치 바둑의 포석을 하듯 영국은 페낭 싱가포르 등 해양 거점이 되는 섬들을 점령해 갔다. 거문도에 포석을 둔 그들이 노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 유서 깊고 사연 많은 도시 페낭에서 답사단의 일원인 강영민 작가가 평화의 퍼포먼스를 벌였다. 아세안 10개국 국기(현재 말레이시아가 아세안의 대표다)와 동북아 4국(중국 몽골 한국 일본)를 흔드는 사람들 앞에서 제주도 한라산에 내린 눈을 녹인 물과 제주도 앞바다의 바닷물을 섞은 물을 코코넛 그릇에 담아 동인도회사 마크가 붙은 포르투갈 요새의 녹슨 대포 포신에 뿌렸다. 




@ 마호메트의 도시 쿠알라룸푸르 


말레이시아는 1990년대에 수도 쿠알라룸푸르의 인구 과밀화를 막고 분산시키기 위해 행정 수도인 푸트라자야를 새로 설치했다. 그러나 여전히 쿠알라룸푸르가 말레이시아의 중심이다. 이 쿠알라룸푸르에서 낮 동안 돌아다닌 곳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은 이슬람아트뮤지엄이었다면 밤에 돌아다닌 곳 중 가장 인상적인 곳은 부키트 빈탕이 밤거리였다. 자유분방하게 무슬림 남녀가 어울리는 모습은 이슬람에 대한 선입견을 깨주었다. 청바지를 입은 마호메트를 보는 기분이었다. 


쿠알라룸푸르의 화려한 밤은 다양한 종교의 말레이시아인들이 스스럼없이 어울리도록 만들었다. 가장 융합하기 힘든 것 중 하나가 바로 종교다. 2010년 말레이시아 인구 주택 총 조사에 따르면, 인구의 61.3%가 이슬람교를 믿으며, 19.8%가 불교, 9.2%가 기독교, 6.3%가 힌두교, 1.3%가 유교, 도교 등의 전통 중국 종교를 믿는다. 이슬람 사원 옆에 불교 사원 그 옆에 힌두교 사원이 있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나라가 바로 말레이시아였다. 다민족, 다문화, 다언어 사회인 말레이시아는 우리에게 ‘이슬람과의 공존'과 관련해서 힌트를 준다.


말레이시아의 정치 체제에서 눈여겨 볼 것은 중국계에 경제력으로 뒤진 말레이계가 정치적 헤게모니를 유지하는 방식이다. 말레이시아의 정치 체제는 영국 웨스트민스터 체제와 유사하다. 부미푸트라(말레이인 또는 말레이시아 내 원주민)를 중국인이나 인도인 등 비부미푸트라보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올려놓는 것으로 말레이계이 정치적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식이다. 이런 부미푸트라 정책을 유지하면서도, 중국인들의 안전을 담보해 주는 방식으로 인종 갈등을 완화하고 있다. 




@ 마하티르의 도시, 랑카위 


말레이시아의 지도자 중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바로 마하티르 전 총리다.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외환위기를 맞았지만 마하티르는 ‘독자생존'의 길을 택해 성공적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이 마하티르가 모델로 삼은 나라가 일본과 한국이었다. 그는  "국가 경제의 발전을 위하여 일본과 대한민국으로부터 배우자"라는 ‘향동학습정책(向東學習政策, Look East Policy)’을 내세웠다. 


마하티르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말레이시아의 정치력이다. 다양한 지배자들을 경험하면서 말레이시아는 정치의 중요성에 일찍 눈을 떴다. 1967년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싱가포르와 함께 ASEAN의 결성을 주도한 나라가 바로 말레이시아였다. 마하티르는 국제무대에서 국력이 약한 나라를 대변하면서 영향력을 키웠다. 랑카위는 그 마하티르의 고향으로 그가 말년에 안착한 곳이기도 하다. 그는 랑카위를 국제 기준에 맞는 휴양도시로 가꿔 말레이시아의 미래를 구현했다. 정찰제로 바가지 요금을 없애고 영어로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게 만들어 랑카위를 국제적인 휴양지로 키웠다. 


이번 주변국가로만 본 말레이시아를 ‘아시아 역사의 주체'로 보게 된 계기가 된 것은 철기문명 유적지 답사였다. 기원전 5세기 경부터 철기를 생산한 곳으로, 동남아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철기문명 유적지 발굴 현장을 방문했다. 보로부두르와 앙코르와트 전에 강력한 철기 문화가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유적지다. 신전이 있어서 종교가 있었다는 것을, 철기를 생산하는 산업이 있었고, 이를 운송하는 무역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유적지 답사는 고대사의 퍼즐을 푸는 듯해 흥미로웠다. 대체로 10만 명 정도의 농업 기반의 계급사회인 도시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했다. 탄소 연대 측정을 위해서 세 곳에 시료를 보냈는데 그곳 중 한 곳이 한국(그외 미국과 일본)이었다고 한다. 오랜 옛날 세계 어느 곳에 뒤지지 않을 만큼의 문명을 만들어냈던 말레이인의 DNA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었다. 말레이시아인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된 이번 답사의 화룡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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