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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고재열 기자입니다. 이메일 gosisain@gmail.com 트위터 twitter.com/dogsul 페이스북(페이지) facebook.com/kojaeyoul 페이스북 페이지는 facebook.com/kojaeyoul '믿지마 연애상담' https://story.kakao.com/ch/dogsuldotcom/app 독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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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광주가 아니라 1930년 광주를 보자

재미로재미연구소 | 2013.08.27 10:00 | Posted by 소셜미디어의 촌철살인마 독설닷컴





    어릴 적 광주는 너무 큰 도시여서 도시가 아닌 도시였다. 전라도의 변방, 영광. 그 영광이 굴비의 주산지인지도 몰랐을 만큼 외진 깡촌에서 살았던 내게 광주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도시였다. 그런데 그 광주는 또한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신기루와 같은 도시였다. 내가 생각했던 광주와 내가 본 광주의 간극이 컸다.


    광주를 보고 와서도 ‘내가 광주를 보고 왔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때 산수경시대회 출전을 위해 다녀와서도 그랬고 중학교 때 수학경시대회를 다녀와서도 그랬다. 그때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은 내가 다녀온 곳이 화려한 도심이 아니라서 그랬던 것 같다.


    대학시절에는 친구들을 따라 광주의 대학가를 가보았다. 그런데 그때도 ‘내가 광주를 보고 왔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때는 좀 다른 의미였다. 5.18 광주민중항쟁의 주역이고 ‘녹두대’니 ‘오월대’의 전설을 간직한 학생운동의 성지를 상상했던 나에게 서울의 대학생들과 하등 다를 것 없던 광주의 친구들은 조금 충격이었다.


    그리고 기자가 되어 이런 저런 이유로 광주를 찾을 기회가 많았는데, ‘내가 광주를 보고 왔는가’ 하는 의문은 계속되었다. 광주민중항쟁의 무대였던 금남로와 충장로는 쇠락한 구도심이 되어 생기를 잃은 상태였고 상무지구라는 신생 유흥가가 등장해 광주답지 않은 웃음을 팔고 있었다. 여전히 광주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얼마 전 드디어 광주를 찾았다. 광주의 근현대 문화가 집중된 양림동에 반해 그곳으로 이주한 문화기획자 이한호 씨와 함께 그 동네를 함께 둘러보고 드디어 광주를 찾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 막연하게 생각했던 광주가 그곳에 있었다. 실제 광주시민들이 생각하는 광주가 있겠지만, 내게는 양림동이 바로 광주였다.


    양림동에 대해서 들은 설명은 대략 이렇다. 서울의 서촌과 비슷한 지형으로 풍경화를 그대로 옮겨 둔 것 같은 양지바른 이 동네는 광주에 내려온 선교사들이 터를 잡은 곳이다. 이 선교사들은 이곳에서 종교 활동뿐만 아니라 의학이나 다른 학문의 전파에도 힘을 썼다. 그들에게서 배운 광주의 ‘모던 뽀이’modern boy들이 국내외에서 두루 활약했다는 것이었다.


    양림동의 문화적 부활을 도모하고 있는 이한호 씨는 1930년대의 광주에 시선을 돌렸다. 그는 “광주는 1980년에 머물러있다. 5.18 광주민중항쟁의 아우라가 너무나 세다. 마치 1980년 이전의 광주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아무런 얘기가 없다. 1980년 이전의 광주를 보기 위해서 광주의 역사를 되짚어 보았다. 그리고 1930년대 광주에서 흥미로운 것들을 두루 발견했다”라고 말했다.


    양림동 출신으로 중국에 가서 3대 혁명작곡가의 반열에 오른 정율성, 차이코프스키의 직계 제자로 꼽힌 정추, 그리고 양림동 언덕에서 ‘가을의 기도’와 ‘플라타너스’를 노래한 김현승 시인까지, 그들이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양림동에 바로 광주가 있었다. 서양문물을 창조적으로 수용한 예술 천재들을 만들어낸 양림동의 저력이 바로 광주였다.


   이한호 대표는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주목했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은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한 일본 학생들에 항의하다 일본 학생을 편드는 경찰에 반발해 광주 학생들이 일으킨 대규모 시위로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당시 이 사건으로 전국적으로 582명이 퇴학당하고, 2,330명이 무기정학을 받았으며 1,642명이 검거 되었는데, 그 대부분은 광주의 학생들이었다.


    양림동은 엘리트 학생에서 하루아침에 룸펜이 된 징계 학생들의 놀이터였다. 혈기 방장한 젊음의 분출구였고 어린 지성들의 교류의 장이었다. 나라도 잃고 학교도 잃은 수백 명의 학생들이 날마다 모여서 무슨 얘기를 하고 무엇을 도모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어쩌면 1980년 광주도 1930년 광주에 답이 있을지 모른다.


    개인적으로 양림동과 관련해 관심이 가는 것은 종교적 역량이 다른 역량으로 전이되고 확장되는 부분이었다. 김현승 시인의 경우처럼 종교와 문학이 만나는 지점과 정율성과 정추처럼 비록 혁명이라는 다른 과정을 거쳤지만 종교와 예술이 만나는 지점이 궁금했다. 양림동에는 호남신학교가 위치하고 있는데 종교와 학문, 종교와 철학이 만나는 지점에 대한 화두도 던질 만 했다.


    1980년 광주는 중요하다. 더 말할 필요도 없을 만큼 명백히 중요하다. 분명 광주는 1980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그러나 우리는 1980년 이후의 광주만을 보았다. 광주는 그 이전에도 존재했고 1980년 광주의 맹아는 분명 그 이전에도 있었을 것이다. 1930년 광주가 궁금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양림동에 가서 또 하나의 광주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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