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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고재열 기자입니다. 이메일 gosisain@gmail.com 트위터 twitter.com/dogsul 페이스북(페이지) facebook.com/kojaeyoul 페이스북 페이지는 facebook.com/kojaeyoul '믿지마 연애상담' https://story.kakao.com/ch/dogsuldotcom/app 독설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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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북의 문화예술 대표 지킴이 '최순우'와 '변월룡'

B급 좌판 위원회/행복한 책꽂이 | 2012.08.01 10:05 | Posted by 소셜미디어의 촌철살인마 독설닷컴



주> 여름에 읽을만한 책 두 권 소개합니다. 

남과 북에서 문화예술을 지키고 근간을 놓은 두 문화예술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남한의 최순우, 북한의 변월룡... 

너무나 많은 것을 누리고 있는 오늘의 우리가 한 번쯤 기릴만한 삶인 듯 합니다.  

 




“혜곡 최순우는 보수의 표상이 될 만한 인물”



문화인물 전문 전기작가인 이충렬씨의 책은 늘 허를 찔렀다. 당연히 전기가 나와 있을 줄 알았는데 없는 인물을 콕 찍어서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말끔히 뽑아낸 전기를 선보였다. 2년 전 써낸 ‘간송 전형필’ 전기가 그랬고 이번에 펴낸 <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도 그랬다. 책을 받아들고 처음 든 생각은 ‘아직 전기가 없었나?’였다. 


간송 전형필에 이어 혜곡 최순우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그는 “수집가 간송이 소중한 우리 문화재를 지킨 사람이라면 국립박물관장이었던 혜곡은 우리 문화재의 우수성을 알린 사람이다. 간송은 다 갖춘 상태에서 시작했지만 혜곡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이뤄냈다”라고 말했다. 국립박물관 개성분관의 서기로 시작해 학예사를 거쳐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혜곡은 고려청자 가마터를 발굴해서 고려청자의 역사를 밝히고 제조법을 재현한 것을 비롯해 숱한 업적을 남겼다. 그가 쓴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는 지금도 스테디셀러다.


혜곡의 전기를 읽으면 ‘그가 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그런 생각을 했을까’ ‘배흘림기둥에 대해서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저자는 혜곡이 일본의 화려함과 중국의 웅장함 사이에서 움츠려 있었던 우리 문화재가 기지개를 켤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미술의 역사를 5000년으로 늘려 국격을 높였다. 정권이 아니라 국가에 봉사했다. 오늘날 보수의 표상이 될 만한 인물이다.” 


저자는 혜곡의 가장 큰 공은 우리 문화재를 우리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 것이라고 했다. “자연산천과 어울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적당한 모양과 적절한 색깔을 취한 우리 문화재를 풀이해주었다. 백자 달항아리의 아늑함과 청자 비취색의 아련함이 갖는 소중한 의미를 알려주었다.” 


전기는 다양한 에피소드가 담겨 마치 소설을 읽는 것처럼 술술 읽힌다. 저자는 “혜곡의 바람은 우리 민족이 문화적 향기를 갖고 사는 것이었다. 문화의 시대, 한국미를 찾아 나선 그의 순례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라고 말했다.






윤이상·송두율… 그리고 또 한 명의 경계인 '변월룡'



남한과 북한 사이에 있던 경계인, 윤이상·송두율 다음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천재가 또 한 명 있다. 바로 한국인 미술학 박사 1호 변월룡이다. 


러시아 명문 레핀 미술대학 교수를 역임한 그는 한국전쟁 직후 북한을 방문해 평양미술대학의 근간을 마련한 미술계 거장이었다. 북한의 내로라하는 미술가들이 그의 제자를 자처할 만큼 영향이 컸다. 하지만 소련 국적자로서 북한으로 귀화하기를 거부했던 그는 숙청당해 두 번 다시 북한 땅을 밟지 못했다. 


미술평론가 문영대씨는 1994년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변월룡을 처음 접했다. 그는 그때의 감격을 “한국 미술의 취약한 뿌리를 찾았다는 생각에 정말 기뻤다. 일본 화단을 통해 들어온 후기인상파 이후 사조의 영향을 받은 한국 미술계에 구상주의를 제대로 배우고 이를 북한에 전수한 화가가 있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라고 말했다. 


연해주에서 성장한 변월룡이 한국 땅을 밟은 것은 한국전쟁 직후 불과 1년3개월 남짓한 시간뿐이다. 그런데 정통 서양화가인 그의 작품에는 한국화의 특징이 강하게 보인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반영하는 초상화에서는 ‘터럭 하나만 닮지 않아도 그 사람이 아니다’라는 우리 전통 초상화의 ‘전신사조’ 정신이 보이고, 즐겨 그린 소나무 동판화에서는 문인화의 기백과 담백함이 엿보인다. 


문영대씨는 2005년 변월룡의 작품 전시회를 기획했다. 그런데 어이없는 이유로 무산되었다. 문씨는 “당시 참여정부는 북한과 문화교류를 활발하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 변월룡 선생의 전시회를 한다는 사실이 북한에 알려지자 북한 측이 압력을 넣었다. 민족 반역자의 전시회를 열지 말라는 것이었다. 결국 무산되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그를 소개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북한은 그의 발걸음을 거부했고 남한은 그의 그림을 거부했다. 그는 죽어서도 경계인이었다. 변월룡은 끝내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1990년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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